모모노케 히메: 플라톤이 사슴신을 죽였다

아시타카는 재앙신이된 맷돼지를 죽이고 죽음의 저주를 받는다. 맷돼지는 이렇게 말한다. "어리석은 인간들아 자연의 증오와 한을 너희가 알겠느냐" 아시타카는 부족을 떠나 서쪽으로 향한다. 서쪽에 도착하여 에보시가 다스리는 마을에서 본 것은 재앙이다. 자연과 인간이 맞붙으며 숲은 활기를 잃고 죽어갔다. 

 

#이원화에서 일원화의 세계로

 

플라톤 이전에 인간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을 보지 않았다. 자연의 신비한 힘에 무서워했고, 공존하고 경배해야할 대상으로 여겼다. 하지만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서양 사상의 토대가 되며 세상을 이원화하여 바라보는 관점을 퍼뜨렸다. 현실과 이데아가 따로 존재하듯이, 이 세계는 둘로 분절되는 것이다. 산업화를 이루고 자본주의 사회를 탄생시켰다. 선과 악, 부자와 빈자 그리고 '인간과 자연'. 이로써 자연은 인간세계와 분리되어 정복할 대상으로 여겨졌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자연은 인간에 의해 해체되었다. 따라서 에보시 마을도 철을 생산하며 숲을 정복해 나간다. 들개와 원령공주가 저항하지만, 수가 적은 들개에 반해 에보시 마을의 총기는 수두룩하다. 총기 제작을 보고 아시타카는 "숲도 빼앗고 산의 신들을 재앙신으로 만들고도 그 총으로 원한을 살 셈이야?"라고 묻는다. 하지만 에보시는 원한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자연을 파괴한다. 산업화를 등에업고 정복을 거듭한 인간의 역사와 같다. 

 

하지만 영화는 결코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길 원하지 않는다. 다시 일원론으로 세상을 보길 바라는 것이다. 우선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을 부정적으로만 그리지 않았다. 에보시 마을은 총을 제작해서 숲을 파괴하지만, 남성, 여성의 이분화가 없는 곳이다. 여성이 생산활동에 참여함으로써 남성에 의해 차별 받지 않는다. 주인공 아시타카를 도와주기도 한다. 그래서 마냥 숲은 착하고 인간은 나쁘다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더욱이 에보시 마을 사람들은 선량하게 자기가 맡은 업무를 하고 있을 뿐이며, 중심 세력 싸움에서 밀려나 변방에서 힘을 키우고 있는 중이다. 

 

사슴신은 회복, 삶, 생명을 상징하는 신인 것 같지만 죽음까지 아우른다는 점에서 에보시를 비롯한 인간은 죽음, 사슴신은 생명 이렇게 나눌 수 없다. 즉, 사슴신은 삶과 죽음 모두를 다스린다. 삶과 죽음은 하나다.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양자역학에서 유명한 예인 '슈뢰딩거의 고양이'에서 이 식빵굽는 고양이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가 된다. 이 말도 안되는 상태가 현재 과학계에서는 인정받았다고 하니, 사슴신은 양자역학에 따라 고안된 신인 것이다. 에보시가 사슴신의 머리를 베자, 곧 숲도 인간도 죽음의 위기에 처한다. 결코 한쪽만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 인간과 자연인 셈이다. 역시 이 또한 둘로 구분지어 생각할 수 없다. 

 

모모노케 히메 / 출처: 나무위키

#All u need is love

 

아시타카는 운명을 개척하는 자다. 원래 주인공들은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데, 모아나도 그랬고, 트루먼도 그랬다. 아시타카가 부족을 떠나기전, 부족의 히이는 이렇게 말한다. "누구도 운명은 바꿀 수 없어 허나 운명을 받아들이느냐 맞서냐는 자신의 선택에 달렸다." 아시카타는 운명에 맞선다. 에보시 마을에 똑같이 재앙신의 저주로 누워있는 사람이 나온다. 그는 운명을 받아들였기에 병자의 상태로 누워있을 뿐이다. 아시타카는 운명에 맞서다가 원령공주를 만난다. 그녀를 에보시로부터 구해낸 후 이렇게 말한다. "내 뜻대로 여기 왔으니, 내 뜻대로 가겠어요" 그리고 후에 들개가 "원령공주는 인간도 들개도 될 수 없는 불쌍한 운명이다. 니가 구원해줄거야?"라고 묻자 "그건 모르겠고 같이 살아갈 순 있어"라고 답한다. 인간은 결국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것. 어쩌면 그것이 운명의 종착점이자 출발점인 것이다. 들개나 맷돼지와는 다르게 아무리 세상이 재앙이라도 인간은 서로 기대누울 한 사람만 있으면 영원히 행복할 수 있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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