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아니, 살인해본거야? / 김영하 소설
- 리뷰/책
- 2020. 7. 24.
#이정도면 누구 죽여본거 아니냐고...
'빛의 제국',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읽으면서 김영하 작가의 진면목을 보지 못했다. 오히려 무라카미 하루키의 냄새가 짙은 문체에 색깔이 없다고 감히 생각했다. 하지만 살인자의 기억법에서는 그의 진면목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치 살인을 해본 것 같은, 치매에 걸려본 것 같은 디테일한 묘사는 소름 돋는다. 시각적인 자극이 아닌, 활자를 통해서 내 상상력으로 소름이 돋은 것은 오랜만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공(空)이라는 김영하의 메시지대로, 나는 텅빈 실체가 아닌 내 상상속에 실제하는 살인자를 떠올리며 경악했다.
예를 들면, 치매에 걸린 살인자 김병수가 TV에 나온 연쇄살인범 이야기를 보고 '혹시 나였을까?'라고 자문하는 모습. 스스로 적은 노트를 보면서 박주태를 다시 상기하는 모습. 개가 있다가 없고 또다시 나타나는 기이한 현상들. 그 개가 물고온 사람의 손. 은희와 박주태의 관계. 그리고 마침내 절정으로 치닫는 마지막 10페이지.
#살인의 풍성함 그리고 무(無)의세계
살인자 김병수를 보면서 비교하게 된 것은 톨스토이의 소설 속 죽음을 맞는 '이반 일리치'다. 두 사람은 똑같이 죽음을 향해가지만 그 양상이 완전히 다르다.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가 차이를 만든다. 이반 일리치는 가짜인생을 살았다. 스스로가 원하는 것이 아닌, 나중엔 결국 스스로 원했다고 착각하는 허레 허식과 권력만을 쫒았다. 보잘 것 없다고 생각했던 머슴에게 진정한 위로를 받고서야 헛된 인생을 돌아보는 이반 일리치인 것이다. 하지만 김병수는 다르다. 그의 인생은 그야말로 본인이 스스로 원한 의미로 가득차있다. 그것이 살인인 것이 문제지만 어쨋든 그는 남을 죽이면서 의미있는 삶을 산 것이다. 그래서 (사형을 당했어야 마땅한)그는 이반 일리치처럼 전전긍긍하며 살지 않았다. 그의 생각을 인용하면 이렇다. '안형사 너는 알고 있구나. 살인이 무엇인지, 피가 흥건한 현장이란 어떤 것인지. 살인, 그 불가역적인 행위의 힘을. 거기에는 우리를 깊숙이 끌어들이는 마력이 있지. 그런데 안형사. 나는 언제나 발을 뻗고 잔다네.'
이렇듯 그는 미켈란 젤로가 예술작품을 조각조각 내면서 완성해 나가듯이 본인의 삶을 풍성하게 완성시켜 나간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는 무(無)의 세계로 돌아간다. 그가 기억을 모두 잃어가기 때문에도 그렇고, 죽음에 가까워져서도 그렇다. 무의 세계를 알기란 힘들다. 나는 항상 가득가득찬 세계만 보고 산다. 내 눈 앞에 있는 핸드폰. 존재하는 것이다. 핸드폰에 뜨는 팀장의 업무 카톡 역시 너무나도 존재하는 것이다. 많은 철학자들이 고민했던 것. 눈 앞의 실체는 존재하는 것인가?라는 물음은 그래서 터무니 없어 보인다. 하지만 진짜 핸드폰이 실제하는 것인지, 내가 상상속으로 구현해 낸 것인지 어떻게 알까싶기도 하다. 진짜 세계에서 나는 영화 매트리스처럼 외계인들의 에너지원일지 모르는 일 아닌가. 그러나 김병수는 마지막 순간 반야심경을 읊는다. 그는 현실은 허상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던 걸까.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공(空)가운데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의지작용과 의식도 없으며...(중략)...늙고 죽음이 없고..." 그릭고 결국 그는 마지막으로 우주의 먼지, 아니 그것조차 아닌 완전한 무(無)가 됨을 체감한다.
김영하는 불가의 반야심경, 그리고 플라톤부터 이어진 서양철학이 몇세기를 고민한 이 세상의 실체를 살인자를 통해 전달했다. 내가 깨닫기에는 아직 먼 소설이다. 느낀 점이라고 적었지만 이 소설의 깊이의 표면밖에 안될 것이다. 섹스와 여자 없이도, 김영하는 쾌감을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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